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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종대 새로운 집현전의 등장


한국의 역사에서 집현전(集賢殿)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것은 고려 인종 때이다. 인종 16년(1138) 5월 26일(庚戌)에 궁궐 안에 있는 전각과 궁문의 명칭을 고치고 왕이 직접 현판을 썼는데, 이때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으로 바꾸었던 것이다.3) 연영전은 고려 전기에 설치한 대표적 문한(文翰) 기구 가운데 하나였다. 소속 관원은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학문이 뛰어난 자를 뽑았다. 연영전을 계승한 집현전 역시 같은 성격의 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명칭을 바꾼 그해 11월에 인종은 집현전에 행차하여 김부식(金富軾)에게 「주역(周易)」을 강론하게 하고 여러 학사(學士)들로 하여금 토론하게 하였다는 사실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집현전이라는 명칭은 그대로 존속되었고 조선왕조로 계승되었다.

조선 초 집현전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정종 원년(1399) 대사헌 조박(趙璞, 1356∼1408)은 “집현전은 한갓 그 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다”고 지적하면서 옛 제도를 회복하여 경적(經籍)을 강론하게 함으로써 고문(顧問)에 대비하게 하자고 건의했지만 곧바로 실현되지 않았다. 태종10년(1410)에도 집현전을 열어 경사(經史: 경전과 역사서)를 강론하게 하자는 사헌부의 상소가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마침내 태종 17년(1417)에 이르러 집현전의 활성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건의가 사간원에 의해 제출되었다. 그 핵심은 인재의 양성이었다. “인재는 국가의 기용(器用: 도구)이니 미리 양성하지 않을 수 없다[人材, 國家之器用, 不可以不預養也]”는 논리였다. 집현전의 설치는 인재를 선발해서 경사를 강독하고 글을 짓게 하여 문풍(文風)을 진작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후에도 문신들을 선발해서 집현전에 모아 문풍을 진작하자는 건의가 계속 이어졌다. 세종 원년(1419) 2월에 좌의정 박은(朴訔, 1370∼1422)의 건의가 있었고, 같은 해 12월 세종은 유사(儒士) 10여 인을 뽑아서 매일 집현전에 모여 강론하게 하라고 명했다. 세종 2년(1420) 3월 13일, 집현전에 녹관(祿官)을 설치하도록 했다. 녹관은 녹봉을 받는 관리, 즉 전임관을 의미한다. 이는 역대의 집현전 제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로, 세종대 집현전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3일 후에 집현전의 직제가 확립되었다. 이전과는 성격이 다른 새로운 집현전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 집현전은 궁중에 두었고, 문관 가운데 재주와 품행[才行]이 있고 나이가 어린 사람을 선택해서 관원으로 충당하였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경사를 강론하기를 일삼아 고문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집현전에 소속된 녹관의 숫자는 10명에서 32명, 20명으로 때에 따라 변화가 있었지만 그들에게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겸임하게 하고, 문한(文翰)의 일을 전적으로 맡기고, 고금(古今)의 일을 토론하게 하고, 밤낮없이 논의하고 궁리하게 하는 관례는 유지되었다.



3)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서는 연영전의 이름을 집현전으로 변경한 시점을 인종 14년(1136)이라고 하였다[「高麗史」 卷76, 志 30, 百官 1, 諸館殿學士].

 

2. 집현전의 운영 방식

이처럼 집현전은 인재를 양성하고, 문풍을 진작하며, 왕의 고문에 대비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이를 위해 집현전 관리들에게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강론하게 하여 학문적 역량을 기르도록 독려하였다. 아울러 집현전 관리들에 대한 다양한 지원 방안을 모색하였다.

조선왕조의 관직은 대부분 임기제로 운용되었는데, 집현전 관원은 다른 관청과 달리 구임(久任)*이 관례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한 목적이 오로지 문한(文翰)을 다스리기 위함이라고 강조하면서 집현전 관원들은 “오로지 학술만을 일삼아 일생을 마치기를 기약하라[專業學術, 期以終身]”고 당부한 바 있다. 집현전관의 구임은 “세종조에 집현전에 박사·저작·정자의 직책을 두어, 연소(年少)하고 배울만한 자를 택해서 보임하여 차차로 천전(遷轉)해서 직제학·부제학에 이르게 하였다. 또 한곳에만 구애될까 염려하여, 간혹 대간(臺諫)의 직임을 주어 나가게 하였으나, 다른 관직을 제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재(人材)가 배출(輩出)되었다”라고 한 성종대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조선시대 특수관직의 장기근무제도

이와 함께 집현전의 관원에 대한 일련의 우대책도 시행되었다. 일례로 집현전의 관리들에게는 직무에서 벗어나 독서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 이른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혜택을 주었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권채(權綵=權採)와 저작랑(著作郞) 신석견(辛石堅=辛碩祖), 정자(正字) 남수문(南秀文) 등을 불러 명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集賢官)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처럼 세종은 집현전 관리들의 교육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세종은 집현전 관원 가운데 나이가 젊고, 재주가 있으며, 몸가짐이 단정한 소수의 인원을 선발해서 긴 휴가를 주고 산에 들어가서 글을 읽게 하고 그 비용을 관에서 지급하였다. 때문에 당시 집현전에 선발되는 것을 영주(瀛州)에 오르는 것에 비유했다고 한다. 영주란 신선이 산다는 전설 상의 산이다. 영주에 오른다는 것은 선비가 선경(仙境)에 들어간 것처럼 특별한 영예를 얻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 태종이 천하의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문학관(文學館)을 설치하고 18인의 문신을 학사(學士)로 임명하자 당시 사람들이 이를 영주에 올랐다고 일컬은 데서 유래한 말이다. 당시 집현전 관원들의 명예와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이밖에도 세종대에는 집현전 관원을 같은 품직(品職)의 반열에서 수위에 두었고[班頭], 사헌부의 규찰에서 제외하는 등 우대하였으며, 서울과 지방에서 인쇄된 각종 서적을 사여(賜與)함으로써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세종은 그들로 하여금 경사(經史)·제자백가(諸子百家)·천문(天文)·지리(地理)·의약(醫藥)·복서(卜筮) 등을 폭넓게 연구하게 하여 장차 활용하고자 계획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세종은 집현전에 서적을 비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는 사신이 왕래하는 편에 중국에서 서적을 구해 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신들을 파견해서 국내의 여러 서적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구한 서적은 ‘장서각(藏書閣)’에 보관했으니, 유사 이래로 오늘날처럼 문적이 성한 적이 없었다고 자부할 정도에 이르렀다. 또한 이러한 여러 서적들에 대한 탐구의 토대 위에서 예악(禮樂)·종률(鍾律)·천문(天文)·의상(儀像)·음양(陰陽)·역산(曆算)·의약(醫藥)·복서(卜筮)의책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리해서 인쇄·반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집현전은 이상과 같은 세종의 관심과 우대에 기초하여 국정 운영의 주요 기관으로 부상하였고,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그 기능을 점차 확대해 갔다.


3. 집현전의 고제(古制) 연구

세종대 과학기술 정책은 국왕인 세종의 지휘하에 대신(大臣)과 집현전 관리들의 집단적 연구를 통해 그 방향이 수립되었고, 실무의 집행은 해당 관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정책 방향의 수립을 위해서는 ‘예악문물(禮樂文物)’·‘전장문물(典章文物)’로 표현되는 유교 국가의 제도와 문화에 대한 이론적 탐구, 다시 말해 ‘고제(古制)’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다. 본래 고제란 유교의 이상사회로 간주되었던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의 제도, 다시 말해 유교에서 이상적이고 보편적이라고 간주하는 제도를 뜻한다. 유교경전 가운데 하나인 「주례(周禮)」는 주(周)나라의 관제를 수록한 책으로 여겨져 후대 유교 국가의 조직과 관직 제도를 수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삼대의 제도는 그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시기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그 내용을 상세히 전해주는 책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물제도를 논할 때는 각종 제도가 완비되었던 당·송(唐宋)대의 그것도 고제에 포함해서 살펴보게 된다.


요컨대 고제 연구는 조선왕조에 적합한 유교적 이상 국가의 모델을 찾아가는 작업이었다. 집현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고제 연구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하고 문학지사(文學之士)들을 모아서 날마다 경연(經筵)을 열고 도의(道義)를 강론했으며, 무릇 여러 시조(施措: 일을 시행하고 조치를 취함)는 모두 고제를 참고하게 한 다음에 그것을 행했다”라는 신료들의 회고를 통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대의 대표적 고제 연구 기관으로는 예조(禮曹)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그리고 집현전을 들 수 있다. 태종대와 세종대 초반까지 고제 연구의 중심은 예조와 의례상정소였다. 집현전이 고제 연구에 참여한 것은 세종 10년(1428) 무렵부터였다. 세종 2년(1420) 집현전이 설치된 이후 8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면서 소장학자들이 성장했고, 그들의 학문적 역량이 당시 최고 수준에 도달할 정도로 향상했던 것이다.

고제 연구 과정에서는 중국의 영토 바깥에 위치한 제후국으로서 조선의 위상이 주요 변수로 작용하였다. 이는 보편적 중화문명의 수용을 제한하는 두 가지 요소를 야기했다. 하나는 중국 본토와 떨어져 있는 조선의 공간적·풍토적 여건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본토의 제후국과는 다른 해외의 제후국[海外藩國]으로서의 조선의 위상이었다. 요컨대 지리적·환경적 요인과 해외 제후국으로서의 분의(分義)를 고려하면서 보편적 중화문명을 구현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유교적 보편성과 조선의 개별성을 조화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해외의 제후국인 조선에 해당하는 분명한 전례가 없는 경우가 많았기에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따라서 세종대에는 치밀한 고제 연구를 통해 제후국의 분의에 맞는 문물제도를 정비해야만 했던 것이다.

세종대 고제 연구에는 유교 경전과 역사서뿐만 아니라 거질의 유서(類書)들이 활용되었다. 유서란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여러 책에 나오는 내용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항목별로 나누어 분류·배열함으로써 독자들이 찾아보기 쉽도록 엮은 책을 가리킨다. 세종 대 고제 연구에 활용된 대표적 유서로는 「통전(通典=杜氏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산당고색(山堂考索)」, 「책부원귀(冊府元龜)」, 「태평광기(太平廣記)」, 「옥해(玉海)」, 「사림광기(事林廣記)」 등을 들 수있다.


4. 고제 연구와 과학기술

세종대 과학기술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집현전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는 집현전의 고제 연구에 과학기술 분야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집현전을 통해 육성된 인재들이 과학기술 분야의 정책 추진에 적극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고제 연구에는 오례(五禮)·사례(四禮)와 같은 각종 의례나 과거제·토지제도와 같은 제도의 문제뿐만 아니라 천문역산학이나 도량형(度量衡)과 같은 과학기술에 관련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세종 12년(1430) 9월에 집현전 부제학 정인지(鄭麟趾, 1396∼1478) 등에게 주척(周尺)을 고정(考正: 상고해서 바로잡음)하게 한 것이나, 세종 14년(1432) 7월에 세종이 정인지에게 간의(簡儀)의 제작을 명했을 때 정인지가 정초(鄭招, ?∼1434)와 함께 고제를 상고하는 일을 맡았던 것, 세종 25년(1443)에 집현전으로 하여금 산학을 진흥할 수 있는 방법[歷代算學之法]을 연구하게 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사실 천문역산학을 비롯한 각종 과학기술 관련 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함께 사업을 담당할 수 있는 실무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필요했다. 이에 세종은 학문 연구의 기반을 조성하고 연구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 작업이 이루어졌던 공간이 경연과 집현전이었으니, 양자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며 유교적 의례와 제도를 연구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경연의 내실화를 꾀하기 위함이었다. 경연관은 겸직이라서 본직 수행에 바빠 강의 준비를 충실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경연의 내실화를 위해서는 경연을 전담하는 관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이에 지금까지 유명무실했던 집현전을 정비하고 학식과 품행이 뛰어난 젊은 문신을 뽑아 경사를 강론하게 함으로써 왕의 고문에 대비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했던 것이다. 실제로 집현전 학사들은 세종대의 경연에서 경사를 강론했으며, 세종은 집현전의 설치가 경연을 위한 것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집현전과 경연은 세종대 최고의 학문 연구 기관이 되었다. 세종은 스스로 “나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독실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予自幼篤志學問, 未嘗少懈]”고 할 정도로 학구적이었는데, 경연에서 집현전 관리들과 함께 사서오경을 비롯한 유교경전과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의 역사서, 「성리대전(性理大全)」등을 독파했다. 그것은 본문만 읽는 단순한 강독이 아니라 주석까지 치밀하게 검토하는 명실상부한 학문 연구였다. “나는 경사 가운데 두루 살펴보지 않은 바가 없다”라는 세종의 자부심은 이렇게 길러진 것이었다. 이렇게 경연에서 축적된 학문적 성과는 세종대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전장문물을 구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경연과 집현전을 통해 길러진 인재들은 세종대 과학기술 분야의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세종 13년(1431)에 집현전 직제학 유효통(兪孝通) 등에게 명해 기존의 향약방(鄕藥方)을 빠짐없이 수습하여 종류를 나누고 증보하여 의서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세종 15년(1433)에 완성된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었다. 세종16년(1434) 금속활자의 개량 사업[갑인자(甲寅字)]에는 집현전 직제학 김돈(金墩, 1385∼1440)과 직전 김빈(金鑌=金銚, ?∼1455) 등이 참여하였고, 세종 27년(1445) 완성된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 과정에서도 집현전 부교리 김예몽(金禮蒙), 저작랑 유성원(柳誠源), 직제학 김문(金汶)·신석조(辛碩祖), 부교리 이예(李芮) 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태종이 일찍이 장상(將相)의 재목으로 문관 정인지와 무관 홍사석(洪師錫, ?∼1448)을 지목하여 세종에게 위촉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정인지는 세종 5년(1423) 집현전관으로 선발되었으며 이후 세종대의 각종 문화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세종대 천문의기 제작 사업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기문(記文)의 적성을 담당했던 김돈이나, 이순지(李純之, 1406∼1465)의 뒤를 이어 천문역산학을 담당했던 김담(金淡, 1416∼1464) 등 세종대 과학기술 분야의 중추인물 대부분이 집현전관을 역임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