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 기술정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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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결정론을 넘어 기술-시장-조직간 공진화로


4차 산업혁명 기술로 불리는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컴퓨팅, 빅데이터, 인공지능, 블록체인, 사이버-물리시스템과 같은 일련의 기술발전이 현대 산업사회의 도래 이래 본 적이 없는 100년만의 대전환을 촉발시키고 있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들은 급진적 기술발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모든 것이 바뀔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과 기술결정론의 한계가 있다. 이에 반해 필자는 기술이 일방적으로 다른 분야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미치며 ‘공진화(co-evolution)’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기업조직들이 탄생했던 19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의 상황을 살펴보면 특히 기술과 시장, 그리고 조직간의 공진화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19세기 초중반에 지리상의 발견, 제국주의적 침략, 도시화, 보건위생의 발전 등으로 대규모 시장수요가 창출됐으나 이런 거대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1차 산업혁명 기술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은 제한적이었다. 당시 기업들은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공장에서의 생산성은 높아졌으나 여전히 제한된 지역의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생산과 판매에 머물렀다. 획기적 대전환의 계기가 된 것은 19세기 중후반 철도, 도로, 전화, 전보 등 교통 통신 기술의 발전이었다. 교통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걸친 물류, 생산, 판매의 효율적 관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교통통신 기술의 연결가능성을 활용하여 19세기 후반 역사상 처음으로 다양한 기능분야들과 사업들을 내부에 보유하고 광범위한 지역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는 현대적 기업조직이 탄생했고 그 결과 인류의 생산력이 유례없이 빠르게 급증했다. 대량생산 컨베이어벨트 기술은 그후 20세기 초에 이런 거대 기업들에 의해 발명됐다. 즉 시장과 기술, 조직이 공진화한 것이다.


공진화하는 세 가지 영역 중 기술의 역할은 ‘가능화(enabling)’이다. 즉 새로운 기술이 그 이전까지 불가능하던 가치창출이나 경제행위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이 급진적으로 발전한다고 해서 패러다임 전환이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 바로 현재와 잠재 고객들의 집합인 시장이다. 아무리 기술이 새로운 상품의 생산을 가능하게 만들어도 시장에서 고객들이 원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소멸하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시장수요의 효율적 충족을 담당할 기업조직의 변화도 반드시 뒷받침 되어야 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도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2차 산업혁명이 19세기 중후반 교통과 통신 등 연결기술의 발전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초연결’과 ‘초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기술은 전체 인류의 미래에 또 다른 엄청난 대변혁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최근 Amazon, Google 등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기업들의 예에서 생생히 볼 수 있듯이 이런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발전을 선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기업조직들과 시장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공진화 관점이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시장과 조직과 어떻게 공진화 할지를 예측하려면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들이 가지는 ‘가능화(enabling)’ 효과를 살펴봐야 한다. “초연결”과 “초지능”이라는 표현이 시사하듯이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들은 고도의 연결과 데이터 획득/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즉 세상의 모든 데이터들이 실시간으로 연결, 수집, 공유, 분석되어서 미래 예측에 활용되는 4차 산업혁명은 경제활동의 규모, 범위, 속도, 그리고 예측가능성을 그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대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의 기술발전과 공진화 할 것으로 예상되는 미래 시장과 조직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상품시장의 쇠퇴와 고객중심적 통합시장의 도래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발전이 시장에 초래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큰 변화는 시장경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래 경쟁의 주 대상이던 동일한 유형의 상품들의 집합인 상품시장이 쇠퇴하고 개별 고객들의 전체 수요를 대상으로 하는 ‘통합시장’이 이를 대체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이 빅데이터 등을 통해 각 고객의 일상생활의 구체적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게 만들어서 특정 상품만이 아닌 고객의 전체 일과의 각 시점마다 필요한 모든 상품과 서비스의 효율적이고 통합적인 제공을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시장경쟁의 주 단위가 개별 상품시장을 넘어서서 개별 고객의 ‘일상 생활시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통합시장으로 급격히 대체되고 있다. 따라서 기업간 시장경쟁의 주 대상이 과거와 같이 개별 상품시장에서의 점유율이 아니라 고객들의 일상 생활시간 전체에 대한 ‘접근권’으로 대체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객접근 역량에서 압도적 지배력을 가진 Amazon, Google 등이 광범위한 상품시장들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가지는 기반이다. 이에 따라 기업의 시장전략은 개별 상품의 구매가 아니라 아예 고객들을 하루 종일 자기 기업의 상품 포트폴리오 전체에 묶어 놓는 것으로 바뀌었다.


통합시장에서 경쟁우위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각 고객의 ‘관심(attention)’을 지배하는 역량이다. 하루는 24시간으로 유한하고 인간이 관심을 기울이는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양한 대상들에 동시에 관심을 집중하기 어렵다. 그런데 만일 어떤 기업이 특정 고객의 일상 생활과정에서 어떤 대상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관심집중 시간’ 전체에 대한 지배적 접근권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그 일상 생활에 관련된 모든 것이 다 가치창출의 대상이 되므로 엄청난 경쟁우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최근 Amazon, Google, Apple 등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플랫폼기업들이 인공지능 스피커를 거의 무료로 배부하면서까지 빅데이터에 집착하고, 또 표면적으로는 서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다양한 사업분야들로 끊임없이 진출하는 것도 바로 이런 고객들의 일상생활 전체의 관심집중 시간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상품 자체의 경쟁력에 초점을 맞추던 상품시장의 시대가 끝나고 통합 시장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기업조직군의 분화와 생태계 경쟁


4차 산업혁명 기술의 ‘가능화 효과’로 인해 다양한 조직들의 집합인 생태계의 구성이 전혀 다른 역할을 하는 세 가지 유형의 조직군들로 분화되고, 또한 새로운 형태의 조직군도 출현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보고서들에서 흔히 관찰되는 오류는 미래 조직유형을 한 가지 특정한 형태로 일반화하려는 시도이다. 4차 산업혁명과 함께 공진화 할 미래 조직의 특성을 예측하려면 플랫폼 지배기업과 같은 특정 조직군뿐 아니라, 다양한 조직군들이 모인 생태계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다음 세 유형의 조직군들이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할 것이다.


첫째, 4차 산업혁명 시대 조직군들 중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고객들에 접근권을 독과점하는 Amazon, Google, Apple 등 소수의 ‘플랫폼 지배기업(platform-dominant players)’들이다. 다양한 유형의 조직군들이 생존하고 성장하려면 고객들의 시간에 대한 접근기반 즉 ‘플랫폼’이 필요한데 이런 플랫폼을 지배하여 ‘플랫폼 리더십’을 행사하는 기업들이 바로 이들이다. 플랫폼 지배기업들은 자신이 주도하는 플랫폼에서 활동하는 다른 모든 기업들이 언제 어떤 가치를 어떤 고객에게 어떻게 제공할지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전체 생태계를 이끌고 갈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아무리 강력한 플랫폼 리더십을 가진 기업도 혼자서 생태계의 모든 수요를 충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다양한 유형의 조직군들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필자는 이런 두 번째 유형의 조직들을 ‘플랫폼 멤버(platform members)’로 부르는데 이들은 플랫폼 지배기업들이 주도하는 생태계가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과 상품, 서비스, 사업들을 각기 공급함으로써 일종의 거대한 분업구조를 형성하는 생태계 구성원들이다.


세 번째 유형의 조직들은 플랫폼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생존하고 성장하는 주변부의 ‘독자 기업(stand-alone outsider)’들이다. 이들 독자 기업들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첫째 유형은 플랫폼 지배기업들과 경쟁하지도 않지만 그들의 빅데이터나 인공지능과도 상관 없이 지속적으로 생존하는 기업들로서 이들은 앞으로도 플랫폼 지배 기업들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전통 장인기법으로 명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기업 등이 그 예이다. 여기에 비해 또 다른 유형의 독자 기업은 플랫폼 지배기업들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주변부에서 잠재적으로 플랫폼 지배기업들의 기반을 뿌리째 흔들 수도 있는 새로운 파괴적 혁신을 시도하는 혁신기업들이다. 만일 이들이 성공한다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조직군 생태계 자체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위력적인 창조적 파괴가 발생하게 되고, 바로 이런 혁신 기업들 덕분에 자칫 소수에 의한 반영구적 독과점 체제로 굳어질 수도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생태계가 역동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경계투과형 집분권화 조직구조


그렇다면 미래 조직의 구조는 어떻게 바뀔까? 무엇보다 조직 내외부간 경계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발전으로 조직 내부에서 수행해야 더 효율적인 활동들과 외부에서 수행하는 것이 우월한 활동들의 종류와 범위, 규모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특히 4차 산업혁명 기술의 발전이 다른 기업들과의 통합조정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임으로써 다양한 활동들을 유연성의 감소와 관료적 비효율성을 무릅쓰고 내부에 계속 보유하고 있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조직경계는 ‘기업분할(unbundling)’과 ‘투과성 경계(permeable boundary)’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조직 내부로 수직계열화 되었던 활동들의 상당 부분이 독립 조직들로 분할되어 조직경계 밖으로 나가는 ‘조직분할(unbundling)’이 가속화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조직경계 밖으로 분할되어 나간다고 해서 통합조정이 더 어려워 지지는 않는다. 바로 4차 산업혁명 기술들의 ‘가능화’ 효과 덕분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들은 같은 조직 내부에서 대면 접촉을 통한 상호작용을 하지 않더라도 기술적 솔루션을 통해 구성원들이나 부서들, 그리고 다른 기업들이 오히려 전 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협력하고 통합조정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시너지가 기업 내부의 구성 단위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과 기업간 협력네트워크 수준에서 추구되게 되었다. 최근 첨단 기업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은 바로 이런 추세의 전조이다. 궁극적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조직경계는 실질적으로는 내외부의 구분 없이 자원과 정보, 역량 등이 자유롭게 경계 넘어 왕래하면서 시너 지를 창출하는 ‘투과성 경계(permeable boundary)’로 바뀔 것이다.


기업조직 내부 구조와 관련하여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이슈는 4차 산업혁명 기술이 과연 미래 조직의 구조를 더욱 피라미드형으로 집권화시킬 것인지, 아니면 수평적인 분권화 구조를 만들지에 대한 논쟁이다. 이에 관련하여 필자는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집권화와 분권화간 이분법적 논리를 무너뜨리게 될 것으로 예측한다. 즉 4차 산업혁명 기술들의 발전에 따라 상하 계층간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이 급증하면서 과거처럼 집권화와 분권화의 양 극단 사이에서 특정 지점을 선택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집권화와 분권화의 장점을 결합한 ‘집분권화 구조(centralized decentral structure)’가 빠르게 확산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기업 본부는 플랫폼의 허브로서 강력한 집권적 권한을 가지지만 동시에 다수의 전문화된 하위 현장 단위들이 극도로 분권화된 자율성을 가지는 구조가 기술발전으로 가능해진 것이다. 예를 들면, 플랫폼 지배기업들의 경우 고객 데이터와 같이 플랫폼 지배력과 관련된 역량이나 의사결정은 절대적으로 집권화하지만, 나머지 사업수준 결정권은 현장 단위들은 혹은 생태계를 구성하는 외부 기업들에게 대폭 분권화함으로써 전체 생태계 수준의 집분권화를 추구할 것이다. 물론 집권적 권한을 가진 본부와 분권화된 현장 단위들간의 관계는 과거처럼 일방적 명령-복종이 아니라 상호조정과 통합, 그리고 무엇보다 긴밀한 소통과 협력이 중심이 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위험과 공진화의 과제


4차 산업혁명 시대로의 대전환기를 맞아 기술발전이 이전까지 불가능하던 것을 해결하여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여는 ‘가능화 효과’뿐 아니라, 이제까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던 새로운 사회적 위험과 모순을 만들어내는 부정적 효과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 과거 모든 혁명기가 그랬듯이 역사적 전환기는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시기다. 4차 산업혁명의 급속한 진행에 대해서도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한 긍정적 희망이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지만, 부정적 불안과 공포도 동시에 확산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공지능과 같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조만간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여 인간을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것과 같이 기계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단순한 기술결정론적 관점을 넘어서서 기술-시장-조직간 공진화의 균형 잡힌 관점에서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미래의 양면성을 조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현대 조직이론과 경영학을 창시한 거장 허버트 사이몬(H. Simon)이 시장을 연구하는 분야인 경제학에서도 노벨상을 수상하였고, 또한 1940년대 말에 인공지능의 개념을 제시한 컴퓨터과학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은 공진화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1930년대에 강화학습의 모형을 제시해 인공지능 기술의 기반 원리를 제시한 전설적 심리학자 B.F. 스키너(B.F.Skinner)는 강화학습에 의해 모든 것이 운영되는 완벽한 미래 이상향을 그린 소설 <월든 II>에서 사회의 모든 활동이 강화학습으로 프로그램화 되어 자동으로 운영되더라도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은 예술과 학문 두 가지라고 주장하였다. 즉 주어진 문제를 푸는 것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이 인간 보다 월등하게 잘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주제를 연구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학자의 선택이듯이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이용해 어떤 문제를 풀 것인가는 인간의 주체적 판단으로 결정되어야 할 이슈이다. 어떤 문제가 중요하며 시급히 해결되어야 하는가는 확률의 이슈가 아니라 가치관의 이슈이므로 결코 인공지능과 빅데이터가 대체할 수 없다. 결국 기술은 아무리 뛰어나도 수단이지 주체가 아니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미래는 궁극적 주체인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