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 기술정책연구소

KIST 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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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1945년 광복 시점에서 약간의 과학기술 유산을 물려받았다. 또 광복 이후 이공계 고등교육기관과 국공립 시험연구기관의 정비 등이 이루어졌지만 과학기술정책의 부재로 인해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물렀었다. 다만, 과학기술의 불모지에서도 향후 발전을 위한 씨앗을 어느 정도는 잉태한 시기였었다. 이하에서는 한국 과학기술을 본격
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 어떠한 과학기술정책을 전개하여, 향후 발전을 위한 기본 틀을 어떻게 구축하였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한국 과학기술정책의 가장 큰 특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기본 틀은 아래 그림과 같다. 개발도상국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동안 수많은 연구들과 정책대안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주로 관념적 논의에 치중하고 추상적인 대안에 머물렀으며, 개발도상국들이 실제로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뚜렷
하게 제시한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한국은 이들과는 전혀 다르게, 현실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어떻게 일들을 계획하고 실천해나갈 것인가 하는 “일하는 방식”에 가장 초점을 둔 과학기술정책들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그 결과, 한국 특유의 일하는 방식을 정립하면서 한국 특유의 발전경로를 만들어왔다. 바로 이것이 한국이
자랑할 만한 가장 큰 자산이자, 다른 개발도상국들과는 뚜렷하게 차별화되는 특성이다. 어느 개발도상국도 이러한 방식으로 일한 경우가 없으며, 한국만의 특징적 강점자산이다. 그리고, 한국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있어 한국 정부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한국 정부의 일하는 방식과 내용을 한국식이라고 불러도 충분하다.


한국에서 초기에 시행된 과학기술정책의 기조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 과학기술정책을 파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초기단계(1960년대-1980년대 중반) 과학기술정책은 다음과 같은 뚜렷하고 일관된 지향성을 갖고 있었다. 첫째, 과학기술 발전 그 자체보다는 경제와 산업의 발전을 지원하는 역할을 최우선적으로 목적으로 삼았다. 둘째, 최단 기간에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따라잡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한 과학기술 역량의 배양에 매진하였다. 셋째, 초기에는 정부가 앞장서 과학기술의 발전을 견인하지만, 민간기업이 중심인 민간주도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처음부터 궁극적인 목표이었다.


  1. 경제성장/산업발전과 긴밀하게 연계



한국 정부가 과학기술을 적극 발전시킨 목적은 경제성장과 산업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수출지향적인 산업화 및 산업구조 고도화를 지원하기 위한 과학기술에 초점을 두었다. 정부가 수출지향 경공업 육성 → 수출지향 중화학공업 육성 → 첨단산업 육성을 연이어 추진함에 따라, 이러한 정책 방향에 부응하기 위한 과학기술의 개발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한국은 산업화 초기에 시멘트, 비료, 섬유, 합판 등의 전략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술개발에 중점을 두었다. 이후에는 자동차, 조선, 전자, 화공, 철강 등의 전략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기술개발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에는 반도체, 통신, 바이오, 소재 등 첨단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전략기술의 개발을 강조했다.


한편, 시대가 바뀌면서 경제사회와 과학기술간의 관계가 변화해온 것은 그 의미가 크다. 이는 한국 과학기술이 단기간에 얼마나 빠르게 발전해왔는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이 추구한 기술도입 및 기술개발은 과학기술발전 그 자체에 초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산업발전을 지원하는 것이 목표이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기술 자립을 위한 국내 과학기술 역량의 급속한 배양과 축적이 목표이었다. 하지만, 세 번째 단계인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그 방향이 바뀌어 경제사회의 발전을 과학기술이 앞에서 이끄는 것이 목표이었다. 즉 과학기술의 역할이 경제사회의 발전을 지원하는 역할로부터, 앞장서서 이를 선도하는 역할로 전환되는 수준까지로 발전한 것이다.


  2. 중장기 발전방향과 진로의 명확한 설정


한국 정부는, 단기성과와 효율성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온갖 힘을 쏟았지만, 한국 과학기술이 나아가야 할 중장기 방향 및 최적의 발전경로를 찾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또 이 과정에서 현재의 역량과 한계를 가장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분석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가장 바람직한 미래 발전경로를 탐색하는데 지혜를 모으고자 애를 썼다. 정부는 특히 중장기 과학기술 발전계획을 수립하여 한국 과학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립하고 또 이를 강력하게 실천하면서, 과학기술의 발전을 주도하였다. 중기 과학기술 발전계획으로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에 발맞추어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이 수립한 “제1차 기술진흥5개년계획(1962-1966)”이 최초이다. 이어 1967년에 설립된 과학기술처는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7-1971)에 발맞추어 “제2차 과학기술진흥5개년계획(1967-1971)”을 수립하였다. 이후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연계한 “제3차 과학기술개발5개년계획(1972-1976)”,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과학기술부문계획(1977-1981)”, “제5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과학기술부문계획(1982-1986)”, “제6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과학기술부문계획(1987-1991)”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다른 한편,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과학기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점검하고 중점분야를 육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학기술 장기발전계획들도 추진하였다. 1967년 과학기술처는 최초의 장기계획인 “과학기술개발장기종합계획(1967-1986)”을 수립하여 20년 후인 1986년까지 한국이 개발도상국 중에서 최상위권에 도달함을 목표로 설정하였고, 실제로 그 수준에 도달하였다. 또,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다가오는 21세기를 맞이하여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가가 주요 화두로 등장하면서, 과학기술처는 1986년에 “2000년대를 향한 과학기술발전장기계획(1987-2001)”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서는 2000년까지 한국의 전략적 분야에서 세계 10위권의 기술선진국을 구현하겠다는 담대한 목표를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들 장기발전 계획은 중기 발전계획과 연도별 실천계획에 대한 지침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상호 연계되는 효과를 거두었다.


  3. 국가혁신체계의 조기 구축


한국 정부는 국가혁신체계의 기본 틀을 조기에 구축하기 위해 많은 힘을 쏟았다. 무엇보다도 초기부터 과학기술 발전의 구심체인 연구개발주체의 육성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 1970년대부터는 정부출연연구기관, 1980년대부터는 기업부설연구소, 1990년대부터는 대학의 연구조직을 순차적으로 육성하였다. 1959년 설립된 원자력연구소는 정부의 과학기술에 대한 정책의지가 반영된 현대적인 연구소이었다. 이어 1966년 최초의 현대적인 종합연구소로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설립되었다. KIST는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설립되었지만 자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재단법인이라는 법적 형태를 갖추었다. 또 정부는 KIST에 대하여 적극 지원하면서 높은 처우를 제공하였고, KIST에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들어 한국 산업기술의 발전에 지대하게 공헌하였다. 또 한국의 독특한 제도인 KIST의 성공을 시작으로, 1970년대 이르러 중화학공업 분야의 전략기술 개발을 위한 전문분야별 연구소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에 한국원자력연구소, 한국기계금속시험연구소, 한국화학연구소 등 많은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이 탄생하였다. 다른 한편, 1980년 국가 차원에서 연구개발투자의 효율성과 연구조직의 능률성을 극대화한다는 취지에서 과학 기술계 정부출연 연구기관 16개를 9개로 통폐합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이후 새로운 첨단기술 분야가 대두됨에 따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항공우주연구원, 한국생산기술 연구원 등 많은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이 새롭게 출범하였다.


또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육성에 뒤이어 기업부설연구소를 육성하기 위하여 많은 시책들을 추진하였다. 통상적으로 개발도상국의 경우 대학의 육성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다. 하지만 한국은 정부출연구기관의 설립에 주력한 이후 기업연구소의 육성에 초점을 둠으로써, 정부의 산업화 및 산업기술 발전에 대한 의지가 얼마나 강했던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연구요원에 대한 병역특례, 연구용 견품에 대한 특별소비세 면제, 연구원 30명 이상을 보유한 연구소의 건물 및 토지에 대한 지방세 면제 등 일련의 지원제도를 정비하였다. 이에 따라 기업부설연구소는 1979년 46개, 1981년 53개, 1985년 183개, 그리고 1988년에는 500개를 넘어섰다. 그리고, 대학의 연구조직 확충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사항은 1971년 설립된 한국과학원(현재의 KAIST)이다. 당시까지 고급 과학기술인력은 거의 전적으로 해외유학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산업기술의 고도화와 연구개발을 주도할 고급 과학기술두뇌를 국내에서 육성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특별하게 설립되고 많은 특혜가 부여된 한국과학원은 우수한 고급 과학기술자들을 양성하여 산업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1980년대에 국가연구개발사업들이 추진되면서 대학의 참여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대학의 연구조직도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대학의 연구조직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부터이며, 이를 위해 대학원 정원 확대, 우수연구센터 육성, 대학원 중심대학과 연구중심 대학 육성 등 주요 시책들이 시행되었다.


다른 한편, 국가기술혁신체계의 또 다른 구성요소인 과학기술 관련 법규의 제정과 인프라 구축도 진행되었다. 1967년 과학기술 기본법으로 제정된 과학기술진흥법은 1972년에 대폭 개정되었고, 과학기술 관련 대표적인 법규인 “기술개발촉진법”을 1972년에 제정하여 기술개발준비금 적립제도를 창설하였으며, 우수한 기술자와 기능인를 양성하기 위한 “국가기술자격법”을 1973년 제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 설립되는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을 한 곳으로 집결시켜 연구의 효율을 도모하기 위하여 추진한 대덕연구단지의 건설을 1974년에 착수하여 20년 후인 1994년에 완공하였다. 한편, 미국 국제개발처, 세계은행, 일본 해외경제협력기금 등으로부터 자금을 지원을 받아 연구시설과 장비의 확충을 도모하였다. 이후 정부 예산인 연구기반 구축사업 등을 통해 대형 연구시설과 장비들을 지속적으로 완비하였다.


  4. 연구개발 자원의 확충에 진력


1967년 과학기술처가 출범하면서 매우 빈약한 연구개발 자원들을 확대하기 위한 노력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무엇보다도 초기에는 KIST 설립, 한국과학원 설립, 대덕연구단지 건설 등 연구개발체제 구축에 필요한 소요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예산의 확보하는데 힘을 쏟았다. 또한 산업계의 기술개발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다양한 지원제도들을 마련하여 기업들의 연구개발투자를 매우 적극적으로 유인하였다. 그로 인해 한국의 연구개발투자는 대단히 급속하게 증가하였다. 1963년에는 총연구개발비가 4백만 달러에 불과하였으나, 1970년 32백만 달러, 1980년 321백만 달러, 1985년 1,298백만 달러로 초고속으로 증가하였다. 그 결과 GDP 대비 총연구개발비의 비중 역시 비약적으로 높아져, 1963년에는 개발도상국의 통상적인 수준인 0.25%에 불과하였으나, 1970년 0.39%, 1980년 0.56%, 1985년 1.41%로 급속하게 높아졌다. 한편,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 예산을 확대하기 위하여 경제기획원 관료들과 치열하게 싸워온 과학기술처 공무원들의 헌신과 노력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초고속적 예산 증가는 불가능하였다. 이들은 때로는 설득, 때로는 읍소, 때로는 친분관계 등을 통하여 과학기술 예산을 확보하고자 눈물겨울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특히 예산 담당자들이 잘 이해하고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하기위하여 과학기술부 관료들은 신규 사업의 발굴 및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안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또 1960년대 초부터 과학기술인력의 양성에도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에는 경공업 산업현장에 필요한 기능공과 기술자의 양성이 최우선 과제이었기 때문에 직업훈련 강화, 실업교육 강화, 공업고등학교의 양적 확대 등이 실시되었다. 1970년대에는 중화학공업 발전에 필요한 현장기술자와 과학기술자의 양성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중화학공업의 발전과 첨단산업의 육성에 필요한 고급 과학기술자 양성에 중점을 두어 이공계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 이공계 전문대학원의 역량 강화, 해외 과학기술자 유치 등을 추진하였다. 또 과학기술 인력을 최대한 조기에 확충하기 위하여 제1차 인력개발5개년계획 (1962-1966)과 장기인력수급계획(1967-1986)을 수립하였고, 그 에 의거하여 과학기술인력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과학기술인력은 매우 급속하게 확대되었는바, 1963년에는 총연구원수가 1,750명에 불과하였으나, 1970년 5,628명, 1980년 18,434명, 1985년 41,473명 등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5. 실용적 기술개발에 초점


앞서 기술했듯이, 개발도상국의 경우 일반적으로 대학이 가장 먼저 설립되는 조직이다. 그러나 한국은 달랐다. 물론 기존 대학들이 존재하였지만 한국은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설립이 첫 번째이었고, 그 다음은 기업부설연구소의 육성이었다. 그리고 대학의 육성은 가장 후순위로 밀려났다. 한편, 초기부터 과학기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기술만을 중시하였으며, 과학은 그냥 앞에다 붙이는 정도인 것에 불과하였다. 과학에 큰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그만큼 한국은 초기부터 실용적인 기술개발에 최대의 역점을 두었다. 그 이유는 기술혁신에서 통상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과학 → 기술 → 생산으로 이어지는 선형모형(linear model)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생산으로부터 역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KIST 설립 초창기의 연구방향이, 연구실에서 연구개발을 수행하는 것에 치중하지 않고 산업계 현장을 찾아가 기업들의 도입기술 선정, 소화, 개량을 지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은 점이 이를 잘 나타낸다. 또 한국과학원 역시 초창기의 지향성을, 노벨상이 아니라 시장에서의 성공(winning markets, not winning Nobel Prizes)을 모토로 삼은 점 역시 이와 동일한 맥락이다.


한국의 산업화 초기에는, 국내의 기술축적이 거의 전무한 상태이었기에, 해외기술을 효과적으로 도입하고 이를 잘 활용하는 가장 중요하였다. 따라서 초창기 기술개발활동은 선진국들이 축적한 기술들을 가능한 한 실패를 최소화하면서 효율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초점을 두었다. 당시에는 생산시설과 기술을 거의 전적으로 선진국에 의존하였기에, 도입된 선진기술이 기업의 생산과정에 적용될 때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현장의 문제해결 (problemsolving) 혹은 생산과정에서 야기되는 애로사항 (trouble-shooting)의 해결이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현안이었다. 그리고 이후 기술개발의 초점은 지금까지 가지고 있거나 또는 선진국에서 도입한 기술의 개량을 통해 품질과 생산성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것으로 옮겨졌다. 이와 관련하여 그 당시 상황을 잘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당시 한국 과학자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있었던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박사가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에서 초창기 KIST의 해외과학자 유치에 희망을 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최형섭 소장은 KIST는 아직 기초 연구를 할 단계가 아니므로,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인정받는 이 박사는 거기에 더 머물며 일하는 것이 좋겠다는 회신을 하였고, 이에 대하여 이 박사는 KIST가 기초연구를 할 수준이 되면 반드시 저를 제일 먼저 불러 주십사는 답장을 보내왔다.


 6. 정부와 민간의 합동 노력


한국 과학기술정책의 두드러진 특성의 하나는 정부와 민간부문이 공동으로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어온 점이다. 물론 초기에는 민간부분이 취약하기 때문에 정부주도로 과학기술 발전을 선도하였다. 하지만 민간부문이 크게 성장한 1980년대 이후부터는 두 부문이 공동으로 과학기술 발전을 이끄는 시대로 이행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정부는 과학기술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을 최대한 청취하고 아이디어를 발굴하며 또 적극 반영하려는 매우 전향적인 자세를 갖고 있었다. 정부는 주요 정책과제의 결정과정에서 조찬모임, 공청회 등을 통하여 정책 아이디어의 타당성과 실현가능성을 검증하고자 하였다. 그 상징적인 예는 초기 과학기술정책의 수립에서부터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제1차 기술진흥 5개년계획을 수립할 때 정부는 과학기술정책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민간 전문가들의 아이디어와 의견을 구하였는데, 여기에는 산업계 대표, 저명한 대학교수, 국공립연구기관장 등 당시 한국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민간 전문가 40명이 참여하였다. 또 다른 예는 1980년대 과학기술정책 개발에서 크게 활약한 기술경제연구회의 활동이다. 이 모임은 실질적으로 핵심적인 정책결정과정으로 자리매김하면서, 1980년대에 추진된 주요 과학기술정책의 수립과 집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 모임에는 고위 정부관료, 공공연구기관 기관장, 저명한 대학교수, 기업 대표 등 과학기술계 전체를 망라하는 대표적 전문가들이 참여하였으며, 7년 동안 매월 월례토론회를 개최하면서, 그 당시 핵심 정책과제에 대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중지를 모으며 해답을 찾는데 크게 기여
하였다. 그리고 특별하게도 이 모임에는 과학기술계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그 당시의 대표적인 경제학자와 경영학자들이 적극 참여하여 함께 토론하면서 큰 도움을 주었다.


다른 한편, 정부는 민간부문 기술개발활동의 중요성을 산업화 초기부터 잘 인식하여 다양한 형태의 지원시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산업화 초기에는 국내의 기술기반이 대단히 취약했기 때문에 해외기술의 적극적인 도입을 통한 산업의 발전이 불가피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정부는 1978년 제1차 기술도입 자유화 조치, 1979년 제2차 기술도입 자유화 조치를 단행하여 기술도입에 대한 심사 방식을 허용업종 열거방식으로부터 기술도입을 더욱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제한업종 열거방식으로 전환하였다. 또, 1970년대 후반부터는 산업은행, 중소기업은행 등이 장기저리의 기술개발자금 융자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민간부문의 기술개발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제도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으며, 한국의 기술개발 지원제도는 이 시기에 대부분 정비되었다. 여기에는 조세지원제도, 금융지원제도, 정부구매제도, 연구인력 병역특례제도 등이 포함된다. 특히 1981년에 마련된 연구요원 병역특례제도는 산업계에서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는 데 매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지원제도 정립을 통해, 정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인 민간주도체제가 1980년대부터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7. 전략영역에의 선택과 집중


한국 정부는 제한되고 빈약한 가용자원을 잘 활용하기 위하여, 초기부터 투자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길을 추구해 왔다. 이를 위해 철저하게 투자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순차적으로 가용자원을 집중 투입하는 전략을 시행하였다. 이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들이 각 기관들이 요구하는 투자재원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한 채 결국은 각 기관에게 1/n로 평등하게 배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1/n 논리는 불확실성과 비가시성을 특성으로 하는 과학기술에서 특정영역이 다른 영역보다 더 중요하고 또 높은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한국은 초기부터 희소한 투입자원의 성과를 최대한 높이는 유일한 방법은 전략영역에의 집중적인 투입뿐이라는 인식에서 이를 철저하게 실행하였다. 그로 인해 한국은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전략적 경공업,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한 전략적 중화학공업, 그리고 전략적 첨단기술의 개발에 집중적으로 가용자원을 투입하여 그 성과를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러한 전략적 선택과 집중은 기관 설립 및 인프라 구축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가용자원의 한계로 인해 순차적으로 KIST → 한국과학원 → 대덕연구단지 등을 추진하였다. 최초에는 KIST 설립에만 집중하였고 또 KIST가 잘 운영될 수 있는 임계규모의 자원을 확보해주었다. 또 초창기 KIST는 재료공업, 기계공업, 화학공업, 전자공업, 식품 공업을 5개 중점분야로 선정하였다. 이후 가용자원의 추가 조달이 가능해지면서 정부는 그 다음으로 한국과학원의 설립에 집중 투자하면서 잘 운영되도록 임계규모의 자원을 투입하였다. 특히 한국과학원 설립 초기인 1973년에는 과학기술처 전체 예산의 27%를 집중 투입할 만큼 대단히 파격적으로 지원하였다. 이후 추가적인 가용자원의 동원이 가능해지면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한 대덕연구단지 설립에 중점적으로 투자하였다.


 8. 강력한 실행력을 중시


한국 정부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모함에 있어 강력한 실행력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난제인, 집행 실패(implementation failure)를 훌륭하게 극복하였다. 많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정책은 있으나 구호에만 그치며 집행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데 비하여, 한국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수한 과학기술부 관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 에는 서울공대를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이 포진해있었으며, 이들은 투철한 사명감과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강력하게 이끌었다. 또한 이들이 일하는 방식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희소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정책과 사업들을 추진하였으며, 또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정책수단들을 발굴하고자 애썼다.


과학기술부 관료들은 정책과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그것의 타당성과 성과를 철저하게 분석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어느 사무관이 정책이나 사업에 대한 기안서를 올리면 과장은 그 타당성과 예상되는 성과에 대하여 엄격하게 따져 묻는다. 만일 타당성이나 기대성과가 명료하지 않으면 다시 검토하라고 퇴자를 놓는다. 이후 과장이 올린 기안서는 국장에 의하여 다시 정밀하게 점검된다. 그 과정은 상층부의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진다. 결국 그 사업의 타당성과 성과가 사전에 철저하게 검증된 이후에 정책이나 사업의 추진이 확정되는 것이다. 또 다른 방식은 기관이나 인프라를 새롭게 설립할 때, 그것이 포괄하는 대상 조직이나 업무 내용 등을 먼저 철저하게 분석한 이후에 그에 가장 적합한 기관 설립 (institution building)을 진행한다. 또 그 기관이 충분한 성과를 내면서 효율적으로 운영될 만큼의 소요 예산 확보, 유능한 기관장 선발, 효율적인 관리시스템 구축 등의 조치가 이루어진다. 많은 개발도상국의 경우 이와 같은 사전분석이 없이 무조건 기관부터 설립한다. 또 기관의 설립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 이후의 운영에 대하여는 무관심하거나 손을 떼기도 한다. 따라서 그 기관은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거나, 할 일이 없어 낭비로 이어지거나,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비록 부족하고 희소한 자원을 투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마저도 성과는 귀결되지 못하는 셈이다.


 9.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 그러나 독자적 발전경로


한국 정부는 업무 수행의 목표와 좌표로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가장 중요한 판정과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모든 정책과 업무는 항상 세계무대를 지향하는 것이며, 한국의 현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국제경쟁력의 분석과 국제비교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이루어졌다. 언제나 한국의 현 국제적 위치가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그 실행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한국 실정에 적합하고 한계를 반영하며 주어진 기회를 살리는 길을 모색함으로써, 한국만의 발전경로(localized trajectory)를 추구해왔다.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와 정책 과제는 해외의 성공 경험과 벤치마킹 사례에서 찾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한국 현실에 맞는 길과 방법을 찾아내고자 한 것이다. 많은 개발도상국의 경우 국제기구 및 선진국 전문가들로부터 자문과 컨설팅을 받아 정책을 수립한다. 물론 한국도 국제기구 및 선진국 전문가들의 자문과 컨설팅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한국이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큰 차이가 나는 점은, 이러한 한국만의 길과 해결책을 찾는 과정에서 그 대부분을 국내 전문가들에게 의존한 점이다. 특히 국내 전문가들과의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최선의 해답을 찾아내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어왔다. 결국,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한국 과학기술의 대표적 사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과학기술원, 대덕연구단지, 선도기술개발사업 등 한국 특유의 강점자산을 창출하는데 크게 성공하였다. 또 이를 통해 한국 고유의 발전경로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10. 국가 통치자의 헌신과 리더십


KIST와 같이 새로운 현대적인 연구기관을 설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다. 문교부의 추진, 경제기획원의 추진, 대통령 지시에 의한 경제기획원의 준비 등이 있었으나 부처간 이견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이를 추진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결국 4번째 시도로서 KIST의 설립이 이루어졌다. 국가 통치자가 선두에 서고 정부가 적극 지원하지 않으면 개발도상국에서 도저히 과학기술 발전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고 최형섭 장관님의 말씀이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KIST 건설 초기 3년간 국가 통치자가 1달에 한두 번씩 KIST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누었으며, KIST 연구원의 봉급이 너무 많다는 보고를 받고도 전혀 깍지 말고 그대로 실행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정부 예산을 얻으려고 경제기획원에 들락거리지 말라고 엄격하게 지시하는 등 최고 통치권자의 강력한 의지와 지지가 없이는 결코 과학기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점이 KIST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와 같은 예는 KIST 설립 이후에 전개된 한국과학원 설립, 대덕연구단지 건설, 국가연구개발 사업의 추진 등에서 국가 통치자가 직접 진두지휘한 것에서 잘 나타난다.


종합하여, 한국 정부는 한국의 국가기술혁신체계가 급격하게 발전하고 끊임없이 진화하는 그 변환과정을 앞장서서 이끌어 왔다. 특히 한국 특유의 발전경로를 개척하고, 그 길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도록 정부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한편, 초기에는 불가피하게 정부주도를 강력하게 추구하였지만, 민간부문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많은 지원시책들을 초기부터 추진함으로써 궁극적 지향점인 민간주도 체제로 이행하는 것을 주도하였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그동안 많은 실패들을 경험하고 또 많은 문제들도 야기되었지만, 한국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룩한 성취와 가치는 이들 한계와 제약을 충분하게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크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