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ST 기술정책연구소

KIST 본원

인터뷰




  1965년 5월, 동아일보 경제부 차장으로 한미 정상 회담을 취재하신 바 있습니다. KIST 설립이 논의되게 된 배경과 그 과정에서 특별한 일화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김진현 장관님) 1965년 5월 18일, 워싱턴에서 한미 공동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동아일보 경제부 차장으로 회담 해설보도를 준비하고 있던 중, 당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Production and Technology & Applied Science Institute)의 설치 검토를 위한 고문 파견’이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이를 기사화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당시 정상회담 초미의 관심사는 한국에 어느 정도 규모의 경제적 원조를 주느냐였는데 연구소 설립은 조금 예외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지요. 많은 특파원들이 회담을 보도했는데 그때 어떤 방송사도 이 조항에 대해 언급한 매체가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한미 정상회담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1965.5.20)

 

KIST 설립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보면 처음에는 공업교육 기관을 세워달라고 했는데 한국에서 연구소를 설립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김진현 장관님) 존슨 대통령은 당시 과학 보좌관 호닉 박사에게 한국의 경제발전을 도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주문했고, 호닉박사의 첫 번째 제안은 공과대학 설립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학보다는 공업기술, 응용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필요하다는 우리측의 의견과 조율되어 대학이 아닌 연구기관, 즉 KIST가 설립되는 계기가 됩니다.


KIST 설립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KIST가 중요한 것은 한국의 독특한 성공. 즉, 압축적 성공의 핵심인 ‘변형’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서양이나 일본의 과학기술은 일반적으로 대학에서 태동하고 대학이 학문의 중심이 되는데, 한국은 예외적으로 대학이 아닌 연구소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1965년 당시 서울대 공과대학이 아무리 제일 좋다고 해도 한국의 산업이나 공업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변형이 생기고 KIST가 생긴 것입니다. 다시 말해 KIST는 과학기술 근대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컨버터(converter) 역할을 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바로 활용하지 못하는 고압전류를 저압으로 낮추는 것처럼, 미국의 고급기술을 한국의 산업기술로 연결하는 변압기 역할을 맡은 것이지요. 덕분에 대학, 산업계의 인재들과 핵심 기술들이 KIST를 통해 양성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데 초대 18인의 과학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KIST 설립 초기, 이곳에 오시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당시 박사님 유치를 위해 어떠한 과정이 있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안영옥 박사님) 미국 유학중이던 시절, 우연히 기사를 보다가 바텔 연구소에서 한국에 연구소를 설립하는 일을 하고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작업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향의 편지를 보냈었던 적이 있는데, 그후 얼마간 그 일을 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 박사학위를 마치고 듀폰 중앙연구소에 들어가 일하고 있던 1965년 어느 날 KIST 초대 소장이셨던 최형섭 박사님이 워싱턴 DC에 오셨는데 저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당시 최 박사님을 비롯해서 KIST 설립 준비를 하시던 분들이 저에게 한국에 현대식 연구소를 만드는데 와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제가 속해있던 듀폰연구소와 같은 연구소를 한국에 만드는데 한 몫을 해 달라는 최형섭 박사님의 간절한 호소를 거절할 수 없었고, 지금 생각하면 KIST 설립에 참여하게 된 것은 저에게도 참 큰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KIST 입사당시 고용계약서


당시 그런 결정을 하시기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안영옥 박사님) 당시 제가 있던 듀폰연구소는 과반 이상이 박사로 구성되어 있고 사실 미국인들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연구소였습니다. 심지어 듀폰에서 제 월급이 1,370달러였는데 KIST에 와서 받은 제 첫 월급이 8만 천원이었습니다(사진 참조). 1/4 정도로 줄어든 것이죠. 제가 한국에 간다고 하니 당시 듀폰에서 함께 일하던 안드레이슨 박사가 묻더군요. 한국에는 연구개발과 관련한 기반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가려고 하느냐구요. 그때 저의 대답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국가에서 오라고 하는데 가야한다…” 안드레이슨 박사가 그럼 1년간 한국에서 일을 해보고 여의치 않으면 다시 되돌아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1년이란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났고 결국 돌아가지 못하겠다는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KIST 설립 후 5년간 210명 정도의 연구자를 유치했는데, 초기멤버 5명이 합류 4년 이내에 암이나 백혈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연구개발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척박한 환경에서 책임감, 부담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셨을 텐데,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안영옥 박사님) 당시 한국에는 연구개발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기업은 연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던 때였습니다. 당시 산업계에 있던 제 동기들도 기술이 필요하면 외국에서 사와서 공장을 지으면 그만이지 왜 개발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업으로부터 연구비를 유치해 연구실을 운영해야 하는 바텔연구소 방식을 따랐던 KIST 초기 운영체계는 연구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부담감을 주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한국의 상황과 미스매치가 있었던 부분이죠. 그리고 연구인력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국가적인 대형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척박한 관경에도 불구하고 당시 자력으로 프레온을 생산하는 성과도 거두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안영옥 박사님) 당시 저는 에어컨 등의 냉매로 쓰이는 프레온 가스에 대한 수요가 점차 커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나 당시 우리나라에 이를 개발할 수 있는 원천기술은 전무했습니다. 다행히도 마침 미국 화학회 불소화학 분과위원장을 맡고 계시던 박달조 박사님이 한국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관련분야의 핵심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저희가 할 수 있었던 엔지니어링 쪽은 잘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프레온 가스 공장을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고, 그 길에 당시 초대 과학기술처 김기영 장관님을 찾아갔습니다. 저희가 프레온가스 생산을 위한 파일럿플랜트를 짓겠다고 했더니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으시더군요. 그래서 5천만원을 이야기 했습니다. 참고로 당시 평균 연구비는 2백만원에 남짓했습니다. 김 장관님이 당황하실 수밖에 없었죠(웃음). 그때 제가 설득했던 말이 기억에 납니다. 저는 대한민국에 돌아온 이유가 국가발전에 꼭 필요한 대형 프로젝트를 하기 위해서 였고, 그래야 연구하는 팀도 생길 수 있다고 믿는다구요.


결국 저희는 2천 5백만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자체 기술력으로 CFC-12제조기술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기반이 되어 산업은행의 투자를 받아 지금 후성의 전신인 울산화학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간장공장 밖에 없던 시절, 자체 기술력으로 불소화합물 제조공정을 개발했다고 하니 처음에는 청와대에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해외의 좋은 여건을 마다하고 함께 KIST에서 일하던 동료 과학자분들의 노력 없이는 정말 불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설립 초기, KIST에 대한 국내외 반응은 어땠나요?


(김진현 장관님) 당시 우리나라 대학에서는 KIST의 파격적 지원에 대해 반대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워낙 압도적으로 좋은 조건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한국 경제·산업 발전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우리나라는 선발국과는 달리 대학이 아닌 KIST를 통해 기술개발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과학기술부보다 KIST가 먼저 생겼습니다. 서양의 관점으로 보자면 명백한 변형이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KIST인들에게 남기는 당부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진현 장관님) KIST의 설립 소식을 가장 먼저 전달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또 과기부 장관직에 임하며 KIST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사람으로 KIST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있습니다. 지난 50여년, KIST의 눈부신 성장으로 우리나라 대학과 산업계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많은 전문 출연연의 분리·독립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Victim of
Success’란 말이 있습니다. KIST가 그간의 역할과 임무를 잘 완수했다면, 미래 역할에는 아직 물음표인 부분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과감하게 시도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 과학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본적지인 KIST가 그간의 역사성을 살리면서 새로운 기능과 경쟁력으로 재무장해야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KIST는 범국가적인 R&D 플랫폼 역할을 강화하고, 국가적 차원의 대형 프로젝트에 보다 집중하길 바랍니다. 또한 과거 한-중, 한-소 기술협력센터가 KIST안에 세워졌던 것처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과학기술 외교, 글로벌 협력의 거점 역할을 수행해 주길 기대합니다.